김창호의 단상

2013년 8월24일 Facebook 두 번째 이야기

광동 민우 김창호 2013. 8. 24.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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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꺼지지 않는 고구려의 혼 : 齊나라를 아십니까 > 
    고구려가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지 100년쯤 지난 765년, 중국 산동 지방을 중심으로 고구려 유민이 세운 왕국이 태동한다. 바로 제(齊)나라이다. 제나라는 당나라에 대한 조공을 거부하면서 한편으로는 신라·발해 등과 왕성하게 교역한 명실상부한 독립국가였다. 
    제나라의 건국자는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의 아들 이납(李納)이다. 그러나 제나라를 알려면 먼저 이정기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정기는 고구려가 당나라에 멸망하면서 포로로 잡혀간 고구려인의 후손이다. 당시 당으로 끌려간 20여 만 명은 영주(榮州)에서 생활했다. 고구려 유민들에게는 당나라에서 유일한 신분 상승의 길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고, 이정기 일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로 평로군(平盧軍)에는 고구려 출신의 군인들이 많았다.  
    이정기가 자신이 관할하는 영역 안에서 기반이 확고한 국가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발해의 사신 왕래 및 교역을 통괄하는 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라는 관직 덕분이었다. 이 관직은 이정기의 나라가 군사적 면에서 뿐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강력한 국가였다는 것을 대변한다. 이 관직을 받음으로써 당이 낙양 동쪽 지역에서의 모든 통치 권한을 그에게 위임했다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건중(建中) 2년(781) 정월 성덕 절도사 이보신이 죽자, 이정기는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에게 성덕절도사를 세습시킬 것을 덕종에게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전열·양숭의 등과 반란을 도모했다. 이정기는 먼저 도읍지를 청주에서 낙양에 가까운 운주로 옮겼다. 그리고 조정과 싸우기 위해 변주에 성을 쌓았다. 또한 강·회의 조운을 막음으로써 낙양으로 필요한 재화가 공급되지 못하도록 했다. 이 때 이정기가 조정에 대항한 것은 아들 이납에게 자신의 지위를 세습하기 위한 속셈이었으나, 이정기는 781년 악성 종양으로 죽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당나라에서 그의 아버지처럼 무인 생활을 했다. 검교창부낭중과 총부병을 역임하면서 아버지 이정기의 상주로 치주지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이납은 절도관찰유후에서 청주자사·행군사마·조주자사와 6주의 유후, 어사대부에 임명되었다. 이 같이 이납이 여러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이정기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정기가 당나라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죽었기 때문에 당은 이납을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납은 진주 이유악, 전승사의 조카 전열 등 절도사 후계 세습 문제를 안고 있던 인물들과 제휴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납은 복양에서 관군에게 포위되었다.  
    그 때 상황은 절박했다. 이 때 이납은 항복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탐욕스러운 환관 송봉조가 이납의 운명이 끝난 것으로 착각한 것이 재기의 발판이 되었다.  
    이납은 이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켰다. 조정과 공존하기 위한 협상이 벼랑으로 몰리자 이납은 계획을 바꾸었다. 이 때 상황을 『구당서』의 「이납전」에서는 “이납은 곧 운주로 돌아가 다시 이희열·주도·왕무준·전열과 모의해 모두 반란을 일으켰고, 스스로 제왕이라 칭하면서 백관을 두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도리어 이 위기가 이납으로 하여금 명실상부한 제나라 건국자로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이정기는 물론 그의 아들 이납도 당나라와 무관하게 관리를 임명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다스리는 영역에서 거둔 세금을 당나라 조정에 납부하지도 않았다. 당과의 관계에서 제나라의 독립성은 통일신라보다 더 큰 것이었다. 통일신라와 발해는 수시로 당에 조공을 바쳤으나 제나라는 조공을 바친 적이 없다. 이는 제나라의 국가 성격이 어떠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이다.  
    건중 3년(782) 11월 이납은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하늘에 알리는 재천 의식까지 거행하였다. 이납은 스스로를 ‘과인’이라고 칭했다.  
    이납이 독립한 이듬해부터 다른 절도사들도 각기 독립을 선포하고 장안을 공격했다. 그 결과 783년 10월 덕종은 봉천으로 피난했다. 봉천으로 도망간 덕종은 그 해 12월 사자를 파견해 이납 등과 비밀 협상을 개시했다.  
    당이 유화 제스처를 쓴 후 이납에게 준 관직에 ‘육운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가 있다. 이 관직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납의 제나라가 강력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해외 네트워크를 장악했음을 당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기 때문이다. 관직명에서 나타난 것처럼 이 자리는 신라·발해는 물론 바다 건너 일본에 대해서까지 당나라와의 교통을 조종하는 자리이다.  
    792년 5월 이납은 34세로 요절했다. 그런데 당나라에서 이납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3일 동안 정사를 폐지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제나라가 어느 정도 강력했는가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납이 죽자, 이납의 아들 이사고가 대를 이어 즉위했다. 이사고는 이납 생전에 이미 청주자사가 되었다. 그 때 이사고는 불과 15세였다. 당나라는 이사고가 제나라의 왕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제반 관직을 주었다고 『구당서』에 전하고 있다.  
    나이 어린 이사고가 즉위한 뒤 주변 절도사 가운데 왕무준이 소금 생산지인 체주·합타·삼차를 빼앗기 위해 이사고의 영토로 진격할 작전을 수립했다. 그러나 왕무준의 아들 왕사처의 군영에 불이나 싸우지도 못하고 회군했다. 염전을 확보한 이사고 국가의 재정은 누구보다 튼튼했다. 이사고가 제나라의 경내에서 생산되는 재화와 아울러 주변국과의 외교·통상권을 장악했던 것은 의미가 크다. 이는 이사고의 제나라가 경제적으로 더욱 강력한 국가였던 이유이다.  
    이사고는 신하가 당에 귀순하려는 낌새만 발각되어도 그 가족을 죽일 정도로 당에 대한 적대감이 대단했다. 하지만 이사고는 당나라를 공격하려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아버지 이납보다 더 젊은 32세(806년 6월) 무렵에 죽었다. 당나라는 이사고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남기면서 왕이 죽을 때 사용하는 표현인 ‘홍’을 사용했다.  
    이사고의 유언대로 그의 이복동생 밀주자사 이사도가 제나라의 계승자로 옹립되었다. 이사도는 제나라의 3대 군주였다.  
    이사도 재위시 제나라는 이사고 시대 못지않게 발전했다. 당시 중국의 기록은 이사도의 정치에 대해 “법령이 하나처럼 같은데다 세금마저 균일하게 가벼워 절도사 중에서 제일 강대했다”고 적고 있다.  
    이사도는 당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게릴라전을 구사했다. 원화(元和) 10년(815) 낙양에서 가까운 하음창을 불사르고 건릉교를 끊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이사도가 당나라 조정을 교란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이사도는 낙양 부근의 이궐과 육혼에 많은 전답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 이사도는 낙양의 사저에 수백 명의 병사를 주둔시키며 반란을 획책했다. 당나라의 재상 무원형은 이사도 군사에 의해 피살되기도 했다.  
    당 헌종은 이사도를 공격하기 위해 모든 절도사를 동원했다. 이사도는 일시 궁지에 몰리자 3개 주를 당나라에 헌납하면서 화해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사도의 애첩들이 “제나라가 12주를 소유한데다 영토 안에 수십만 명의 병사가 있는데 그런 조치는 옳지 않다”고 하자 이사도는 자신의 계획을 수정했다. 당나라는 절도사들을 동원해 이사도를 사방에서 공격했다. 이 때 이사도의 도지병마사 유오는 절도사들의 군을 막는 대신 몰래 운주성으로 들어가 이사도를 시해했다. 819년 2월의 일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정기에서 이사도까지 4대 60년 12주를 다스렸던 제나라의 시대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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