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숲유네스코운동

[스크랩] 항일 의병장 신태식 선생

광동 민우 김창호 2016. 1. 19. 18:09

 (글사냥문학회 9집에 실린 향토채록)

 

 

 


 항일 의병장 도암 신태식 선생

 

                                                     김숙자

 

                                              

1,머리말 


1908년 홍주전투에서 물러나 횡성으로 퇴각할 때 적탄에 맞아 어깨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주, 산안전투에 참전하여 왜장 장삼랑을 사로잡아 총살하는 전과를 올린 의병장, 독립운동가<조선말기 1864(고종 1)~1932>이신 도암 신태식 선생(島庵 申泰植 先生)의 일화 채록을 하면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문경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이 글을 정리해 본다. 


2,출생과 행적


1)대일 항쟁에 나서다.


 1864년(고종 원년)음력 11월 22일, 경상북도 가은읍 민지리 도내동(섬안마을)에서 태어나니 본명은 철회(哲會)로 호는 도암(島庵)이며 자는 열경(悅傾)이라 고려 충신 장절공의 후예로 명하(命夏)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숭겸을 시조로 하는 平山 申氏로 대대로 문경에 거주한 선비 가문의 후손이다. 평소 곧은 성품에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슬기롭고 곧은 성품은 일찍부터 기림을 받았으며 글을 익혀 나라 일을 맡으니 통훈대부 중추원 의관이라. 때에 섬나라 적이 삼천리를 누르고 겨레를 짓밟으려 하니 분연히 붓을 던져 칼을 들고 일어섰도다.

 1902년 내부주사 통훈대부 중추원 의관을 역임하였다. 1895년에 거의하여 밀정혐의가 있는 가은면의 김골패와 상주에 사는 강용이 등을 농암장터에서 총살하였다.

일본이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자 관직을 버리시고 위기의 나라를 구하고자 의연히 칼을 잡으시고 의병을 모집하여 대일 항쟁에 나서셨다.

 1907년 8월 3일 단양에서 의병 수백명을 모집하여 도대장에 취임하여 울진, 영해, 영양, 영월, 산동, 제천, 원주, 홍천, 철원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휘하 장졸로서는 도선봉 김세영, 좌선봉에 강창근, 중군에 유제칠, 참모에 엄해윤, 영솔에 조수안, 별포에 김운선 등이 있었다.

 선생은 을사조약 후에도 울분을 참지 못하고 토적의 기회를 보고 있던 차에 관동진에서 통문을 받고 문경읍에 갔다. 그곳에 가니 각처 의병이 운집하여 있다.

 이날이 1907년 8월 30일이었다. 다음날 갈평 장터에 이르니 토별대 수백명이 북양사로 넘어와 종일 교전을 하고 용못<용연(龍淵)>에서 밤을 지내고 적군 2명을 생포하여 목을 베고 나서 풍기를 거쳐 도담삼봉을 지나 단양 귀평에서 군사를 소모하고 장산에서 군사를 소모하니 100여명이 되었다. 그는 이 의병을 거느리고 이강년대장의 소모후군장으로 단양, 죽령, 영월 등지의 전투에 참가 하였다.


2)경상북도 의병단장

 일제는 신태식이 의거하였음을 알고 1907년 9월 1일, 그의 본가에 불을 질러 보복하였다.

1908년 홍주전투에서 물러나 횡성으로 퇴각할 때 적탄에 맞아 어깨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주, 산안전투에 참전하여 왜장 장삼랑을 사로잡아 총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2월 14일 영평, 이동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역부족으로 적에게 잡혔다.

1909년 12월 16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재판하여 내란강도죄로 적용하여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상고하여 1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이는 영평 면민들이 입비송덕(立碑頌德)한 사실을 들어 진정하였기 때문에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가 재차 진정하여 10년형으로 확정된 것이다.

1918년 1월 19일 경성감옥에서 10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하였다.

 곧 이어서 3.1만세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경상도 방면에서 조선독립 후원의용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즉 그는 김찬규, 이응수, 김돈희, 김동진 등 경상북도 지방의 지사들을 규합하여 가을에 서로군정서와 연락해 가면서 국내에서 독립군 활동에 호응, 협조를 목적으로 하는 의용단을 조직하고 김찬규가 경상남도 단장에, 신태식이 경상북도 단장에 선임되었다.

이들은 동지규합 및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전개 하였는데 이듬해 겨울에 일본경찰에 기밀이 탐지되었다. 이로써 대부분의 간부진이 검속되어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지만 지방의 신망 있는 인물들로 조직되었던 이 의용단이 일반 민심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그는 1922년 12월 28일 대구감옥에 수감되었으며 1923년 12월 22일 대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 받았다. 1924년 6월 5일 출옥한 뒤에도 계속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32년 1월 15일 향년 69세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출처:독립유공자공훈록>


3)두만강을 건너 만주 북간도로 진격


 춘천을 거쳐 양양에서 적병에게 대타격을 주고 많은 전리품(광목 두수레, 엽전 사십만냥)을 노획하고 간성에서는 적장 장삼랑을 목베고 다시 춘천에서 운강 이강년대장과 작별하고 단독부대로 활동을 하게 된다. 운강 이강년대장과 작별한 신태식부대는 황해도로 진군하여 신계, 곡산을 지나 수안을 거쳐 수천을 무혈 점령한 후에 희천을 수복하고 또 다시 행군하여 강경까지 진출하였다. 강계에서 의암 유인석을 찾아보고 그곳에서 소모하니 일등포수 90여명이 응모하여 왔다. 여기에서 일군과 조우하여 약 3일간 접전을 하였으나 피차간에 소해가 많았으며 이 전투에서 영월 출신의 김성래가 전사하였다.

 여기에서 다시 회군하여 영월로 돌아와 박화남과 만났다. 박화남의 권유는 부대를 인솔하고 두만강을 건너 만주 북간도로 가서 국권수복을 위하여 항일의군을 재편성하고 국내로 진격하고자 하므로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고 영평으로 진주하니 관동대진의 이은찬이 합진하여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해 둘 것을 권해왔다. 신태식도 좋다고 광동대로 진군하여 태릉에 복병하였다.



4)가사 문학 작품


선생의 가사 문학작품 <강산편답가>와 <창의가>가 있는데

그 중 <창의가>의 일부만 소개해 본다.


<창의가(倡義歌)>


어와 세상 사람들아       금세 형편 들어 보소

아태조 창업하사          오백여 년 내려올 제

오천 년 오순지치         이천 년 공부자도

인의예지 법을 삼아       삼강오륜 분명하다

계계승승 나린 덕화       팔역이 안돈하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중간 기침 근심이라

태상와이 이르기를        인의 있다 칭찬터니

불행할사 을사조약        오적의 농간이라

제 임의로 천편하야       산림천택 전수하니

천지도 희맹 하고         일월도 무강하다

국가가 요란한테          창생인들 편할 소냐.

수백 년 양반종사         리씨 은우 뉘 아닌가


가삼에 끓는 피난         개인개인 일반이라

죽자 하니 어리석고       살자 하니 성병일래

주소로 잠 못이뤄         전전반칙 누웠으니

시문에 개 짖으며         훤호지성 요란허다

문을 열고 탐문허니       관동대진 경통이라

이천만 우리 동포         아연히 있단 말가

군률을 당치 말고         하루바삐 출두허소




칼을 짚고 일어서서             문경읍 들어가니

충남진이 선착허여              적병을 소멸이라

익일에 행진허야                갈평 장터 들어가니

토별대 수백 명이               복양사로 넘어온다

효자진 부합하야                종일토록 접전하니

피차 사망 미판허고             날이 이미 저문지라

용못 와 밤새우고               이명을 사로 잡아

즉지에 목을 베어               망군중에 해시하니

심중에 쌓인 분심               만분지 일 풀릴소냐?




행장(行裝)을 수습하야

고향(故鄕)을 이별할 제


산천(山川)도 설어하고

초목도 비창(悲悵)한 듯


형경(荊卿)이 역수(易水)갈 제

불부환(不復還) 노래로다


*형경(荊卿) : 형가(荊軻)



3, 기념비·묘비와 생가


문경시 모전동에 공설운동장 입구에 정부 보조금과 군민의 성금으로 건립된 기념비가 있으며, 묘소는 문경시 농암면 남밭골에 있으며 생가는 가은읍 민지리 几자 형으로 물이 굽이도는 섬안(島內)이라는 마을에 복원하고 있는 중이다.


<출처: 섬안 올갱이 카페>(의병장 도암 신태식장군과 후손들의이야기)


4,맺은말 


 선생은 그토록 옥고를 치르셨으면서도 큰 뜻을 굽히지 않고 충절하신 분이다.

역사의 얼이 담긴 충절의 고장 문경에서 출생하신 신태식 선생의 행적은 길이길이 보전 되어, 우리 후손들에게 바른 역사와 민족정신을 심어 줄 수 있는 산 교육장으로 계승 발전하여 나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닫는다.


                                           도움 주신분 (선생의 고손자 신대식님)


출처 : 별빛언덕
글쓴이 : 명헌/김숙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