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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 화현면 운악산을 보며 - 판서 김안국 선생과 청백리 최숙생 관찰사

광동 민우 김창호 2006. 9. 16. 23:43
 

- 글과 생각 -

 

 


판서 김안국과 청백리 최숙생 관찰사


 

 

                                               광릉숲 홍익농장 농임업인  김창호


  요즘 모 정치인이 대한민국을 혁신적으로 바꾸는 정책으로 내륙운하건설을 내어 놓아 화제다.  그런데 확실하게 역사적 기록으로 확인된바는  없지만 우리나라의 국가 혁신 방안으로 내륙운하 건설을 처음 생각한 분은 김안국 선생이라고 전한다.

 

 김안국 선생은 당시의 조선을 고대 졸본과 같은 무역국가로의 만드는 전략을 가지고 내륙운하를 추진했다고 전한다.  드라마 주몽에서는 졸본의 연타발을 상단의 우두머리 군장으로 우태를 단지 상단의 대행수로 그리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현대로 따지면 졸본은 지금의 싱가포르와 같은 국가구조를 이루고 있었으니 총통과 국무장관의 역할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안국 선생 시대의 조선은 각 지역에서 자체생산하여 조달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으며 약제품, 보석이나 장신구 등 특정제품만을 마차나 등짐 등의 방법으로 이동시켰다.  이러한 관계로 당시 조선은 무역의 발달은 생각조차 할수 없었고 상업조차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내륙운하를 건설하면 상품의 대량이동이 가능하며 자원과 기술의 비교우위에 따른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므로 일본과 명나라에 비해 생산적 우위를 가져와 무역국가 체계를 갖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안국 선생은 이천의 이포나루에서 의성의 오토산과 안동까지 조각배를 타고 다니며 내륙운하 건설을 생각했다고 전한다.  현 시대에 내륙운하가 건설되면 김안국 선생 시대의 역할을 하기 보다는 유가가 천정부지로 뛰는 지금, 석유에너지가 고갈 위기를 대비하고 도로와 철도건설로 인한 환경파괴를 줄이고 국토의 효율성을 높일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일자리가 창출되고 수자원 확보 효과와 관광레저 산업의 활성화도 기대된다.

 

  내륙운하 건설을 생각했다고 전하는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선생은 조선 중종 때 공조판서, 예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대제학, 찬성, 등을 지낸 인물로 당대 최고의 권력자로 알려져 있는 김굉필 문하의 후배 조광조가 사간원의 정6품 정언으로 있을 때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을 지내기도 했다.

 

  특히 김안국 선생은 성격이 호방하여 중인 신분의 역관 최세진을 '동무'라 칭하며 가까이 하였으며, 1542년 중종 37년 최세진의 영전 앞에서는 7언율시의 만사(挽詞) '최동지세진만(崔同知世珍挽)'을 읊기도 하였다. 「훈몽자회」의 저자 최세진은 지금은 국문학사에 큰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로 존경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1품 벼슬의 사대부와 중인신분인 역관과의 친교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김안국 선생이 한번은 자신을 가르쳐 준 스승 이세정이 백면서생으로 있는 것이 안타까워 충청도의 청양군수로 천거한 뒤 후배들과 함께 당대 최고의 청백리로 알려진 관찰사(지금의 도시자)인 최숙생을 찾아갔다.


"김 판서(지금의 장관)님께서 이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잘 지내셨습니까? 최 공! 이번에 청양군수로 부임하신 이세정 옹은 우리 선생님이십니다. 관직 경험이 없으셔서 걱정이 됩니다. 그렇지만 학문이 깊고 지조가 있는 분이시니 아랫사람 대하듯이 하지는 말아 주시오."

" 예.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 또 최공이 고과성적을 매길 때 너무 낮게 매기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최숙생은 김안국 선생의 일행에게 유쾌하게 답변을 해주었다. 그러나 1년 뒤 최숙생은 당대 최고의 청백리라는 명성답게 이세정에게 고과성적을 「중(中)」도 아닌 「하(下)」를 매겨 파직시켰다.

이에 화가 난 김안국 선생이 관찰사직을 마치고 돌아온 최숙생에게 따지듯 물었다.

"최공! 충청도에는 탐관오리도 많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 많은 사람 중에 우리 선생님께 가장 낮은 점수를 주어 파직을 시킬 수 있나요? 내가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

"예. 충청도에는 탐관오리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교활하고 악랄하다 하더라도 도둑은 수령 하나 뿐이라 일반 서민들이 큰 고통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청양에 가보니 여섯 명의 큰 도둑에 작은 도둑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 군청의 창고는 텅 비어 있고 백성들의 고초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동안 관찰사로서의 소임을 다하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최숙생의 반론에 김안국 선생은 불쾌해 하지 않고, 오히려 최숙생을 관리(공무원)들을 감찰하는 사헌부(지금의 감사원)의 수장인 대사헌에 추천했다. 대사헌이 된 최숙생은 사치와 부패로 해이해진 관리들의 기강을 확실하게 잡았다고 한다.

 

  또한 중종실록에 의하면  한성부 판윤 김안국(金安國)은 생원 서경덕(徐敬德)19406) 과 유학(幼學) 유인선(柳仁善)19407) 을 천거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실록 홈페이지 “[註 19406] 서경덕(徐敬德) : 성리학에 밝았고 또 부모의 상에 여막(廬幕)을 지어 3년을 지내면서 능히 성효(誠孝)를 다하여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註 19407]유인선(柳仁善) : 효도로 소문이 나서 정문(旌門)을 세웠다. “  이를 보면 김안국 선생은 효를 여러 가치 중 으뜸으로 본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은 김안국 선생이 살았으며,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다. 김안국 선생은 "한집안의 번영은 자녀의 교육으로 보장되며, 빈부귀천과 재질을 따질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교육은 필수적이다. 소질에 따라 무슨 직업이든 가르치면 한집안의 생계는 확보되며, 부유한 집과 벼슬 높은 집도 교육을 소홀히 하면 망한다. 금보다 책을 상속함이 낫고, 기름진 논밭보다 작은 재주가 낫다"고 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새겨야 할 지혜의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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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인 시집 “너랑 함께라면 그곳이 어디든 내겐 천국이었어” 학영사 

 

  위의 글은 2006년 경에 어느 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