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호의 세상보기

김창호가 생각하는 축석령 1

광동 민우 김창호 2006. 9. 2. 14:09
 

노고산 축석령과 광릉계곡의 원앙으로 문화상품을 만들자  



  백두산에서 떨어진 산이 천지만협으로 갈라져 십삼도 성지명구를 수없이 배포하였는데, 그 중 한가닥이 남편을 바락 줄멍줄멍 나오다가 포천 축석령에 이르러 두 가닥으로 나뉘어 한 가닥은 삼각산이 되고, 한 가닥은 수락산이 되느라고 과협을 연해치는데 그 과협 틈틈이 사람사는 동리가 있는 중, 그 중 산세가 거하고 수목이 울밀하여 장작불에 먹는 동리는 송산이라.

  송산이 어찌 넓은지 열두 동리나 되는 고로, 초행으로 가는 사람은 집을 용이히 찾지를 못하더라.  그 동리 인민들이 농사하는 여가이면 집집이 말을 매고 나무장사를 하여 모두 걱정없이 생활을 하는데, 산 밑 어떤집 하나는 집을 몇 해나 못이었는지 초가 지붕이 골이 죽져서 기와집 모양이 다되었고, 쓰러진 울타리에 박 덩굴이 얼크러지고, 설주만 남은 사립문을 비스듬하게 달았는데, 이집저집, 뒷집 앞집에서는 굴뚝마다 저녁연기가 나고 사람들이 들락날락하건마는 이 집에는 연기 한점 아니 나고 사람의 그림자도 없어 한이 적적하고, 오직 수없는 잠자리가 울 가지에 가 앉았다 날았다 마당 위로 뒤덮여 빙빙 돌아다니더라.

  위의 글은 이해조 선생님의 소설 “소학령”에서 축석령과 송산을 묘사한 부분이다.


정조 35권 16년 9월 11일 (정미) 001 / 광릉을 참배하다

광릉(光陵)에 전배(展拜)하였다. 아침에 양주목을 출발해서 축석령(祝石嶺)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앉아서 쉬었다. 이때 새벽비가 살짝 지나가고 아침 햇살이 깨끗하였는데, 사방의 산들이 수려함을 다투는 듯 영롱히 빛났다. 상이 승지 서영보에게 이르기를,

“이 축석령은 백두산(白頭山)의 정간룡(正幹龍)이요, 한양(漢陽)으로 들어서는 골짜기이다. 산의 기세가 여기에서 한 번 크게 머물렀다가 다시 일어나 도봉산(道峰山)이 되고 또 골짜기를 지나 다시 일어나 삼각산(三角山)이 되는데, 그 기복(起伏)이 봉황이 날아오르는 듯하고 용이 뛰어오르는 듯하여 온 정신이 모두 왕성(王城) 한 지역에 모여 있다. 산천은 사람의 외모와도 같은 것이어서 외모가 좋은 산천은 기색(氣色) 또한 좋다. 어제 오늘 지나온 산천은 모두가 좋은 기색이거니와 더구나 아침에 비가 개인 모습은 더욱 명랑하고 수려함을 깨닫게 한다. 예전 병진년 행행 때에도 마치 이번처럼 아침에 비가 내리다 금방 개였는데 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능에 이르러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다음 홍살문 밖으로 걸어 나와 좌의정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본릉(本陵)의 형국(形局)은 옛부터 매우 좋다고 칭해 왔었는데 문서로만 보다가 이번에 와서야 그 진면목을 보게 되었다. 누원 동쪽으로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차례차례 겹겹이 나타나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는데 웅장하고 깨끗한 기색을 말로 형용할 수 없다. 비로소 눈으로 보는 것이 귀로 듣는 것보다 크게 나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하였다. 대가가 동구(洞口)에 이르러 선전관에게 명하여 봉선사(奉先寺)의 중을 위로하고 무휼하게 하였는데, 봉선사는 광묘(光廟)의 원당(願堂)이다. 포천 경계에 이르렀을 때 현감 오태첨(吳泰詹)이 부로(父老)들을 이끌고 공경히 맞이하니 상이 대가를 멈추고 위로하였다. 축석령으로 되돌아왔을 때 구경 나온 백성들이 산과 들을 가득 메웠다. 상이 백성의 고통에 대해 두루 묻자, 백성들이 ‘한 집에서 받는 조곡(糶穀)이 10여 석에 이르기도 하는데 모두 군포(軍布)로 바치고 남는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감사와 수령이 있으니 조정에서는 그들을 신칙하여 너희들이 해롭고 지치는 일이 없게 하고 금년의 적모(糴耗)는 특별히 감면시켜 줄 것이다. 칙수(勅需)나 군향(軍餉)에 소용되는 곡식은 아무리 흉년이 든 해라 할지라도 원래 견감시켜 주는 규례가 없으나 이 또한 규례에 매이지 않고 모두 제거해 주도록 하겠다. 조관(朝官)과 사서인(士庶人) 중에서 70세 이상 된 자들은 자급을 올려 주고 유생(儒生)과 무사(武士)는 과장(科場)을 베풀어 선발할 것이다. 그리하여 위로는 선조(先朝)의 융성한 덕을 몸받고 아래로는 백성의 소원을 위로해 줄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양주에 이르러서도 고을의 부로들을 불러 포천에서와 같이 면유(面諭)하고 저녁에는 양주목에서 묵었다.

【원전】 46 집 333 면

【분류】 *왕실(王室) / *구휼(救恤)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인사(人事) / *윤리(倫理)


 위의 글은 조선왕조실록 정조편에 나온 축석령 관련 내용입니다.


  포천 축석령과 관계 된 설화를 소개한 포천시청과 포천문화원 홈페이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오백주 〔1643(인조21)~1719(숙종45)〕선생의 본관은 보성(寶城)이고, 자는 국경(國卿)이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성실하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활을 잘 쏘아 잡은 짐승으로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1659년(효종10)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시험관 유혁연이 15회를 쏘아 15회 백중하는 것을 보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별군에 배치되었는데 대장군이 여러 부하들에게 화살 하나로 표적을 꿰뚫을 사람이 있으면 크게 포상하겠다 하니 오선생이 즉시 화살 하나로 표적을 꿰뚫어 명성을 떨쳤다. 재주가 뛰어나고 충직하며 청렴결백하여 신망을 얻었고 주군절제도위를 거쳐 귀성부사에 이르렀다.


벼슬 때문에 고향을 떠나 있던 어느 해 겨울 부친이 위독하다는 급보를 받고 집에 돌아와 보니 병환이 매우 위중한지라 명의를 찾아가 약을 지어 정성껏 다려 올렸으나 차도가 없어 또 다시 다른 의원을 찾아가 약을 구하여 올렸으나 역시 차도가 없자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며 나의 정성이 부족하여 아버님 병환이 낳지 않는 것이라고 울부짖으며 영약을 찾아 매일같이 다녔는데 어느날 밤 꿈에 신령이 나타나 너의 아버지 변환은 산삼을 석청에 재어 복용하여야 치료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산삼이나 석청은 참으로 구하기 어려운 것인데 항차 눈이 쌓인 엄동에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백주 선생은 정성을 다하면 구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갖고 다음 날부터 높은 산 깊은 골짜기를 누비며 다녔다. 이러하기를 여러날 지났으나 약을 구하지 못하고 부친의 병환은 깊어만 가고 있으니 안타깝고 두렵기 그지없었다.


내 정성이 부족하여 약을 구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부친을 위하여 약을 얻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원하고 있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얼마 전에 현몽한 신령님이 나타나 어느 곳을 지나 어느 산 고개에 가보면 큰 바위가 있을 것이다.  그 바위 근처에 가서 찾아보면 산삼과 석청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지라 “신령님 고맙습니다.”하고 그곳을 찾아가 보니 큰 바위 위에 큰 호랑이가 지키고 앉아 있었다.  오백주 선생은 당황하지 않고 “아무리 짐승이라 하지만 나의 효를 방해할 수 있겠는가. 아버님 병환을 고치기 위하여 이 곳에 약을 구하러 왔는데 방해 말라.  네가 나를 잡아먹고 싶으면 내가 약을 구하여 아버님 병환을 고치게 한 후 나를 잡아먹으라.”하고 범을 바라보니 범은 간데없고 바위만 있는지라 선생은 신령님 신령님 고맙습니다.


산삼과 석청을 구하게 하여 달라고 애원하니 어디선가 벌 소리가 들려오는지라 소리 나는 곳을 찾아 따라가 보니 벌이 바위 틈 조그만 구멍으로 들어가는데 구멍가에 석청이 묻어있어 반가워 그 구멍에서 석청을 파내고 그 앞을 자세히 살펴보니 또한 산삼의 마른대가 보여 산삼을 캐가지고 돌아와 아버님께 드려 병환이 나았다고 한다.


이는 효성이 지극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그 후 이 고장사람들은 이 바위를 범바위 또는 효자바위라 불렀으며 효자 오백주 선생이 이 바위에서 빌어 약을 얻었다고 하여 축석(祝石)이라 하고 축석이 있는 고개를 축석령(祝石嶺)이라 불렀다.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살펴 1723년(경종3) 오백주 선생에게 효자정문을 내려 그 효성을 기렸다.  효자정문은 포천 어룡동에 있다. 오백주 선생이 아버님의 병환을 고쳐드리기 위하여 산삼과 석청을 얻게 해 달라고 빌었다고 전해지는 범바위 혹은 효자바위는 축석령 호국공원(護國公園)에 놓여 있는데 이 전설의 바위는 도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묻히게 돼 이 마을 사람들이 이 효자바위가 묻혀서는 아니 되겠다하여 1994년 3월 후손들의 협조를 받아 현 위치에 옮겨 놓아 효의 상징으로 삼게 하였다.

원 위치는 이 곳에서 동쪽으로 약 500m 지점에 있었다. 포천의 관문 축석령은 효의 상징으로 또한 효자바위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음은 포천의 명예요 긍지다. 축석령을 지날 때마다 백행의 근원인 효를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라는 요지로 포천시청 홈페이지에 소개 되어 있다.


하지만 축석령과 관련하여 효종대왕 이전인 선조실록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면 역사 속에 더 큰 비밀이 있을 수도 있다.


선조 203권 39년 9월 22일 (무자) 003 / 축석령의 은 채광에 관한 별지

별지는 다음과 같다.

“축석령에서 서쪽으로 뻗어나간 산 한 줄기가 빙돌아서 동쪽을 향한 산을 이루었는데, 양쪽 산기슭 가운데 시냇물이 만나는 지점에 하나의 단안(斷岸)이 있고 돌이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아래가 곧 은이 나는 곳인데, 전일 이미 뚫은 구멍은 가로 두 발, 너비 한 자, 길이 두 자이고, 구멍 안에는 철맥(鐵脈)이 돌 사이에 서려 있습니다. 그래서 일꾼을 시켜 정(釘)으로 사면을 깨어 냈는데, 50여 명이 하루 일하여 얻은 수량은 쇠를 부수고 찌꺼기를 제거한 세 가지 품질을 아울러 10여 말이고 괴철(塊鐵)·잡철(雜鐵)은 겨우 두어 말이었습니다. 대개 이번에 일한 구멍은 전후 판 것을 통틀어 좌우로 여섯 파(把), 앞뒤로 석 자, 밑너비 두 자이고, 깊이는 사람 키의 반쯤 되어 모양이 도랑 같은데, 양 머리에 다 맥세(脈勢)가 맺혀 있는 곳이 반쯤 됩니다. 또 하나의 구멍이 있는데, 구멍의 좌우에 액집(液汁)이 흙이 되어 오색이 얼룩지고 철기(鐵氣)가 양 머리에 이어져 있습니다. 반드시 석공을 많이 써서 남포질을 크게 해야 그 정혈(正穴)이 있는 곳을 알 수 있고 힘을 쓰고 공을 얻는 것이 얼마나 될지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원전】 25 집 266 면

【분류】 *광업-광산(鑛山


선조 203권 39년 9월 22일 (무자) 002 / 양주 축석령의 은의 질과 은맥의 길이를 보고하다

“양주(楊州) 축석령(祝石嶺)의 은(銀)을 채취하는 데 대한 난이도와 은맥(銀脈)이 긴지를 살펴보게 하기 위해 본조(本曹)의 낭청(郞廳) 김경립(金敬立)을 보냈는데, 찌꺼기를 제거하고 나온 세 가지 은 10여 두(斗)를 채취해 왔습니다. 대개 은혈(銀穴) 위아래의 바람과 햇볕이 미치는 곳은 모래와 돌이 드물고 은혈 안쪽의 판 곳은 모래 또는 돌이 있는데 품질이 같지는 않으나 일어서 얻은 것은 다 은과 쇠가 섞였습니다. 산에 매장된 것은 다 이러하리라고 생각되나, 석공(石工)을 데리고 가지 않아서 깊이 파지 못하였으므로 은맥이 긴지는 상세히 살피지 못하고 왔습니다. 살펴본 상황은 별지에 써서 아룁니다. 단천(端川)의 은장(銀匠)이 올라온 뒤에 세 가지 은을 녹여 만들어 보아 품질이 좋은 것이 많이 나오면 석공을 데리고 가서 다시 상세히 살피고 의논하여 처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원전】 25 집 266 면

【분류】 *광업-채광(採鑛)



선조 199권 39년 5월 1일 (무진) 005 / 경기 감사 이홍로가 축석령의 은 취련 결과에 대해 장계하다

 

    경기 감사 이홍로(李弘老)가 장계하기를,

“양주 목사(楊州牧使) 정섭(鄭燮)의 첩정(牒呈)에 ‘호조의 관문에 의거하여 진고(陳告)한 사람의 말대로 주(州)의 경내 축석령(祝石嶺)의 은(銀)이 산출된다는 곳에 은장(銀匠)과 군인 14명을 데리고 가서 하루 동안 부역해 은토(銀土) 1말을 굴취(掘取)하여 진목회(眞木灰)5638) 1석, 송명(松明)5639) 4백근, 숯 4석, 취련군(吹鍊軍) 18명을 들여 은자(銀子) 1편(片)을 취련하였는데 무게는 5돈(錢)이다.’고 하였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소득은 매우 적은데 이토록 많은 백성의 힘을 소비하였으니, 이홍로가 일을 좋아하고 공(功)을 좋아한 것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25 집 190 면

【분류】 *광업-채광(採鑛) / *군사-지방군(地方軍)

[註 5638]진목회(眞木灰) : 참나무 숯. ☞


[註 5639]송명(松明) : 관솔. ☞


  지금의 축석령을 생각해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록이다.  역사 속에 분서갱유는 끊이지 않았으며 지금도 중국은 우리 겨레의 역사를 왜곡(동북공정)하고 있다.  특이나 일제는 광개토대왕능비까지 왜곡하지 않았던가?


  도선대사의 답산가(踏山歌)에는 "송성(松城)이 떨어진 뒤에 어느 곳으로 향할 것인가?  삼동(三冬)에는 해 뜨는 평양(平壤)이 있도다.  후대의 현사(賢士)가 대정(大井)을 열매 한강(漢江)의 어룡(魚龍)이 사해(四海)에 통하도다."라 하였다.

  이 구절에 따라 고려 문종은 양주에 남경을 설치했고, 숙종은 개혁정책으로 남경천도를 시도했으며, 조선 태조와 정도전은 한양을 수도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도선의 답산가는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또 달리 많은 것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 첫 번째가 도선대사와 관련이 깊은 한강일대는 지금의 광릉숲과 연결되는 한강과 한탄강의 발원지인 노고산에서 시작하여 흐르는 강줄기 지역이며 실례로 신라 헌강왕 3년인 877년 포천의 왕방산에 왕산사를 창건한 것을 비롯해 많은 사찰을 창건했다. 

  광개토대왕의 호태왕릉비와 역사서에 의하면 영락6년조 백제의 58개성을 점령하고 그 지역에 「마홀(馬忽)군」을 설치하고 관아를 고모루성(古牟婁城)에 두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생긴 「마홀(馬忽)」이라는 지명은 이두식 한자로 맞옮김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홀(馬忽)을 분석하면 마(馬)+홀(忽)로 볼 수 있다.  마(馬)는 고구려시대에 물(水)을 나타내는 매(買)일 가능성이 크다.  즉 매(買)와 마(馬)의 신라시대 발음은 두 글자가 같이 물(水)을 의미한다.  홀(忽)은 고구려의 지명에 붙은 접미사로 신라시대에 성(城) 또는 골(谷)의 한자로 변환시킨 것으로 보아서 그 뜻이 크게 다르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특이나 홀(忽)은 고구려가 건국한 졸본을 쓸 때 홀(忽)자를 써서 忽本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홀(馬忽)이란 지명을 재구성하여 보면 󰡐물골󰡑즉 현재의 지형에서 알 수 있다시피 ‘물이 많은 고장' 이란 뜻으로 추정된다고 이전의 사료는 밝히고 있으나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물이 발원한 땅‘이라고 보아야 맞지 않을까 싶다.  실례로 노고산의 할미재와 축석령에서 발원한 물이 북과 동쪽으로는 한탄강을 이루고 남과 서쪽으로는 한강을 이루어 황해에서 만나지 않는가?


  일제가 인공호수를 조성한 산정호수 주변 하천의 이름은 ‘부소천’이다.  일제는 왜 부소천에다 당시로는 엄청난 돈과 인력이 들었을 인공호수를 조성해야만 했을까? 

  북한에서는 1994년 역사적인 고증을 거쳐 평양 근교에 단군릉을 조성하면서 네 아들의 석조상을 세웠는데 첫째가 부루, 둘째 아들이 부소, 셋째 아들이 부우, 넷째 아들이 부여로 되어 있다.  단군의 둘째 아들인 부소는 부싯돌을 만들어 불을 일으키는 법을 백성들에게 전했으며 이불로 숲을 태워 돌림병과 맹수와 독충을 태워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인간의 소망을 하늘로 실어다 주는 주술적 기운으로 인식되었다.  또 불은 모든 생명력의 근본이 되는 힘으로 만물을 순화하고 재생시키며, 따뜻함과 광명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불을 만들어 숲을 태워 맹수를 죽이고 돌림병을 잠재웠으며 그 부싯돌을 전해준 ‘부소’라는 이름의 하천이 있던 곳에 일제가 인공호수인 ‘산정호수’를 만든 것은 분명 역사에 우리가 풀어내야 할 기막힌 인연의 ‘수수께끼’를 잉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더욱이 이 일대에는 단군신화를 연상시키는 지명과 특징이 많지 않은가?  포천시 영중면 성동리의 ‘곰마을’, 소흘읍 노고산의 ‘곰바위굴’이 있는 주변에는 쑥의 일종인 ‘곰취’와 ‘구절초’가 많이 자라고 있다.  또한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포천시 신북면 틀못이의 ‘동홰놀이’는 모든 부정한 것, 불의의 모든 것을 태워 없애고, 재생시키고, 정화하는 생명력을 지닌 행위가 아닐까? 

  즉, 우리 민족은 기후적으로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한강과 한탄강지역에 처음 살았으나 인구가 증가하고 철원과 평강 등지의 화산폭발로 인해 남과 북으로 퍼져 나가서 일본 민족을 이루기도 하고 몽고족을 이루기도 하고 흉노족을 이루기도 하였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도 있다.  왜냐하면 기후나 자연 환경적으로 좋은 곳에서 사람이 먼저 정착생활을 하고 문명을 꽃피웠다고 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한탄강 유역에서 발견된 주먹 돌도끼는 아시아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으로 전기 구석기 문화권을 기존의 주먹도끼 분포지역인 '선진유럽 아프리카'지역과 자갈도끼 분포지역인 '후진 아시아'지역으로 구분한 미국 모비스 교수의 논리를 뒤집는 중요한 근거였다.  더 나아가 한탄강 유역이 인류문명의 발상지였으며, 아시아 문명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유추해내기에 충분한 유물이다. 

  이상과 같은 논의를 정리해 보면 한탄강과 한강이 발원하는 노고산 할미재와 축석령 주변 지역으로 북으로는 한탄강을 남으로는 한강을 둔 지역은 태초에 사람이 살기 좋은 기후환경과 지역적 환경을 가졌던 곳으로 인류문명이 발생한 곳이며 도시국가의 문명이 꽃피웠던 곳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화산이 폭발하는 등 자연환경의 변화로 여러 차례의 남과 북으로 인구의 이동이 시작하여 남으로는 일본열도로 동쪽으로는 알레스카를 건더 아메리카로 북으로는 몽골평원을 건너 지중해까지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는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은 북쪽에서 남으로 이동하였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인류가 태초에 온난하고 비옥한 토지를 나두고 추운 동토에서부터 살았을리 없다.  일각에서 태초에 문명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큰 강을 끼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큰 강은 항상 범람의 위험을 안고 있다.  태초에 인류문명이 발달하기에 적합한 하천은 왕숙천, 중랑천, 한내천, 영평천, 부소천과 같은 규모의 하천유역이다.  부소천의 부싯돌과 주먹돌도끼가 세월에 흘러가 전곡리의 한탄강가에서 발견된 것은 아닐까?

  특이나 세조대왕의 광릉 숲은 송성(松城)을 이루고 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막론하고 전무하게도 능림으로 200만평을 소나무 숲․송성(松城)으로 조성한 것만으로도 유네스코에 등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노고산 할미재와 축석령에서 발원한 물이 한탄강으로 흘러가고, 한강으로 흘러가 4해를 평정하는 대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세조실록의 기록으로 축석령의 신비스런 역사를 더 생각하게 하는 기록이다.


세조 31권 9년 10월 22일 (정미) 005 / 병조에서 함부로 벌석하는 자를 위제율로 다루게 할 것을 아뢰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돌[石]이란 것은 산맥(山脈)의 골절(骨節)이므로, 다만 도성(都城)의 산등성이 내면에서만 벌석(伐石)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불가(不可)합니다. 청컨대 도읍에 있는 주산(主山)의 내맥(來脈)은 함길도(咸吉道)의 장백산(長白山)에서 철령(鐵嶺)에 이르고, 강원도(江原道) 회양부(淮陽府)의 남곡(嵐谷)에서 금성현(金城縣)의 마현(馬峴)과 주파현(注波峴)에 이르고, 낭천(狼川)의 항현(杭峴)에서 경기(京畿)의 가평현(加平縣) 화악산(華岳山)에 이르고, 양주(楊州)의 오봉산(五峯山)에서 삼각산(三角山) 보현봉(普賢峯)과 백악(白岳)에 이르며, 동쪽으로는 보등동(寶燈洞)에서 다야원(多也院)의 고암 제단(鼓巖祭壇)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향림사(香林寺)에서 녹반현(綠磻峴)의 세답암(洗踏巖)과 북점(北岾) 연창위 농소(延昌尉農所)에 이르니, 모두 벌석(伐石)하지 말도록 하소서. 관해(官廨)와 사사(寺社)를 지을 때나, 대소 인원(大小人員)의 집을 짓거나 묘(墓)를 만들 때에는, 경중(京中)에서는 공조(工曹)에 고(告)하고, 외방(外方)에서는 관찰사(觀察使)에게 고(告)하여 벌석(伐石)할 곳을 살펴본 다음에 계문(啓聞)하여 적당히 지급(支給)하도록 하되, 만약 법(法)을 어기고 벌석(伐石)하는 자는 위제율(違制律)로써 논(論)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7 집 592 면

【분류】 *사법-법제(法制) / *광업(鑛業) / *과학-지학(地學)



  위의 기록을 보면 세조대왕이 얼마나 안보와 문화의식이 높았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할 때 세조대왕과 집현전 학사가 함께 고민하고 의논하며 있었던 일화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왕조시대의 모든 업적은 왕에게 귀속됨을 볼 때 한글창제의 진정한 공로자는 세조대왕이 아닐까?  요즘 드라마 주몽과 연개소문을 보면 형제와 숙질간의 대권경쟁을 볼 수 있다.  또한 얼마전에 끝난 ‘서동요’와 ‘제국의 아침’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신라의 기록을 보면 숙질간은 기본이고 형제자매사위까지 모두 왕위쟁탈전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세조대왕께만은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분의 업적을 폄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음 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좌표를 설정해 주고 있다.


  정조 35권 16년 9월 11일 (정미) 003 / 광릉 주변에서 지켜야 할 예의를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이번 행행 때에 서동구(西洞口)를 지나왔는데 홍살문이 지척에 있는 줄을 처음 알았다. 홍살문에서 10보(步)도 안 되는 거리에서 말에서 내리는 것은 각 왕릉에는 없는 규례인데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필시 과거에 도백(道伯)이 봉심(奉審)하러 다니면서 가깝고 편리한 방법을 택해 이 길이 한번 열린 뒤로 나뭇꾼의 길이 순로(巡路)가 되고 순로가 큰 길이 되어 그렇게 된 것일 것이다. 이미 알고 난 뒤에는 엄히 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들으니 길가는 이들이 이 길을 많이 왕래한다고 하니 이 또한 일체 금지시킬 수만은 없다. 홍살문의 앞을 지날 때에는 시끄럽게 떠들며 지나가지 말게 하고 서동구의 말에서 내리는 곳도 다소 경계를 멀리 정한 다음 나무를 심을 만한 곳은 나무를 심는 것을 모두 연교(筵敎)에 따라 시행하라. 앞으로 근만(勤慢)을 수시로 적간(摘奸)하여 묘당으로 하여금 기백(畿伯) 및 능관(陵官)에게 엄히 신칙하여 이 전교를 재소(齋所)에 게시하게 하라. 축석령(祝石嶺)은 그 지세가 본디 중한 바가 있으니 고갯길에 널려진 돌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고갯마루에 백성의 무덤이 있고 그 아래에는 돌을 캐낸 흔적이 있으며, 주봉(主峰)의 외산(外山)에는 화전(火田)을 일구고 있어 연로(輦路)에서 보니 나무를 베고 불을 질러 화전을 일구려는 흔적이 보였다. 이는 모두 지방관이 엄히 금단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니, 고개 위에 금장(禁葬)하는 일과 그 아래 돌을 캐는 일을 각별히 엄히 금단하고 화전도 아울러 금단하게 하라. 앞으로 도백이 순행할 때에는 반드시 그 범금(犯禁) 사실을 살펴보아 그전처럼 소홀함이 없게 하라. 본릉(本陵)의 조포사(造泡寺)는 다른 능과 다른데 오랜 세월이 지나 폐단이 쌓여 수습하기 어렵다고 한다. 고적(古蹟)과 고사(古事)는 매우 중요한 것인데 어찌하여 무너지도록 방치해 두었는가. 도백에게 신칙하여 속히 수리하게 하고 승려들의 폐단도 바로잡도록 하라.” 【원전】 46 집 333 면

【분류】 *왕실(王室) / *사법(司法) / *풍속(風俗) / *농업(農業) / *사상(思想)



  필자는 축석령광장의 돌담을 볼 때면 본래의 축석령을 현대화시켜 복원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의미가 담긴 문화유산과 예술적 행위를 지키고 정신을 복원하여 세계 평화와 인류 번영의 시대를 열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인류의 탐욕으로 만들어 낸 최대의 설치미술인 DMZ와 철조망을 통해 새로운 평화의 메시지를 창조해 내고, 남북의 분단을 치유하는 통일의 문화, 세계 인류가 함께 더불어 잘사는 홍익의 문화를 꽃피어야 한다.






 김창호 (金昶澔)


 경기도 광릉의 노고산자락에서 태어나 어룡동에 살고 있음

 군산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밴쳐비지니스 연구과정 수료

 현 다산과 운허대사를 실천하는 경제인연합 상임운영위원

 현 삼성화재 광동대리점(www.helpzip.com) 대표 

 현 경기북부시대(cafe.daum.net/bestbukbu) 상임집행위원

 저서 “너랑 함께라면 그곳이 어디든 내겐 천국이었어” 학영사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