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만달러를 향해

디즐레이의 사랑, 평강공주의 사랑

광동 민우 김창호 2008. 1. 24. 23:23
 

디즐레이의 사랑, 평강공주의 사랑



                                                                          김창호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대영제국을 건설한 인물로 더 잘 알려진 벤자민 디즐레이는 유태인 출신의 정치가이자 문학가입니다.


  그렇지만 어려웠던 환경으로 인해 17세 때 변호사 사무소의 견습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문학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디즐레이는 처녀작 「비비언 그레이」로 명성을 얻었고, 풍자소설 「젊은 듀크」로 당대 영국 최고의 작가로 성공을 하였습니다.


  1832년 정계에 입문하여 몇 차례의 낙선 끝에 33세인 1837년에 토리당의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디즐레이는 세 차례에 걸쳐 재무상을 지냈으며, 1868년과 1874년에 수상이 되어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황제’ 칭호를 부여하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을 건설하여 영국국민으로부터 가장 존경받고 사랑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파벌이 난무하고 반유태주의가 극심한 영국 정계에 입문하여 어려운 여건을 가진 유태인으로서 수상이 되어 세계사를 주도하는 나라를 만든 정치가 벤자민 디즐레이를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문학가로서 성공한 디즐레이를 존경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33세에 45세의 과부와 결혼하여 청교도적 도덕성을 중시한 영국 사회에서 가장 충실한 가정 생활의 전형을 보여 준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내 메리 앤과의 식사시간을 가장 행복하게 생각했던 남자 벤자민 디즐레이를 존경합니다.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과 결혼하여 온달을 고구려 25대 평원왕 시대의 최고의 장군으로 만들었다는 일화는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590년 평원왕이 죽은 후 처남인 영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신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전장에 나가기 전 장군은 평강공주에게 승리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노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온달 장군은 강한 의지를 갖고 싸움터에 나갔지만 아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평강공주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온달 장군은 죽은 뒤에도 눈을 감지 못했다고 합니다.


  장례를 치르고자 온달 장군의 시신을 넣어 둔 관을 옮기려 했으나 관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평강공주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한 때문이라 생각하고 공주를 모셔왔습니다.


  그리고 평강공주의 사랑으로 관을 평양으로 옮겨 백성들의 애도 속에서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랑을 꿈꾸고 있습니까?


  나는 디즐레이보다 더 깊은 사랑을 하고 싶고, 평강공주의 사랑처럼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세계사를 주도하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서로간의 깊은 신뢰를 갖고, 이러한 깊은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소설  광릉숲의 저자  김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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